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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환기자] 우리 모두 '일'에 대한 재주를 부려보자
임승환 본부장/경북취재본부

현대간호학의 창시자이며 군(軍) 의료개혁의 선구자로 유명한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1910년)을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이팅게일은 1820년 5월 12일, 영국의 부유한 상류층 가정의 둘째 딸로 태어나 17세 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선언하고 나서자 가족들은 결사반대하고 나섰다. 

그 당시만 해도 간호사는 비천한 직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나이팅게일처럼 번듯한 집안의 처녀가 할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집에 있을 때는 의학 및 병원 관계 문헌을 입수해서 읽었고 가족을 따라 국내외 여행을 할 때는 혼자 인근의 병원과 요양소, 빈민수용소 등을 견학했다. 31세 때인 1851년에는 이집트 여행 중에 다시 한번 자신의 소명을 확신했고, 33세 때인 1853년에는 드디어 런던에 있는 소규모 자선요양소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때쯤에는 부모도 과년한 딸의 자기결정을 막을 수 없어 걱정하며 지켜보고만 있었다.

1854년, 러시아와 오스만제국의 동맹국 간에 크림전쟁이 벌어졌다. 표면적인 원인은 종교갈등이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이에 대한 다른 유럽 각국들의 견제였다. 그 크림전쟁 때는 병참 사정이 극도로 열악하여 다른 전쟁보다 월등히 사상자가 많았다. 오스만을 지원한 영국군의 경우만 해도 전사자가 5,000여명이었던 반면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15,000여명으로 무려 세 배에 달할 만큼 병참 환경이 열악했다. 

이에 영국은 서둘러 부상병을 간호하기 위한 자원봉사대를 조직해 1854년 11월 4일, 전쟁터로 급파했는데 그때 나이팅게일은 38명의 간호사와 함께 전쟁터인 보스포루스(Bosporus) 해협 인근의 스쿠타리(Scutari)로 건너가 영국군 야전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 영국군의 의료체계는 말이 아니었다. 병사들을 소모품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군부의 편견 때문에 후방으로 이송된 부상병들을 위한 시설은 형편없었고 설상가상으로 보급품과 의약품도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녀는 군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묵살 당하기 일쑤였고 병원의 의사들로부터도 협조를 거부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인맥과 자금을 이용하여 야전병원의 조달업무를 총괄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특유의 성실함과 결단력으로 찬사를 받게 되었다.

오늘날 나이팅게일이라고 하면 “백의의 천사”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크림전쟁 당시 그녀의 별명은 “등불을 든 여인”이었다. 그녀의 옷은 백의의 가운이 아니라 짙은 색의 어두운 가운이었고 맡겨진 일도 험하고 어렵기 한이 없었다. 더욱이 당시 전쟁터의 위생환경은 전쟁으로 죽은 병사보다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가 몇 배나 더 많을 정도로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 나이팅게일은 그런 위생환경을 철저히 관리하여 환자의 사망률을 42%에서 2%로 떨어뜨렸다. 

그러자 전쟁터에서는 물론이고 본국에서도 그녀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고 빅토리아 여왕도 그녀를 치하했다. 1856년 2월, 파리협정이 체결됨으로써 3여년간 끌었던 크림전쟁이 끝나자 그해 7월, 나이팅게일도 스쿠타리 야전병원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으로 돌아온 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 당시 영국에서 조성되었던 나이팅게일 기금을 이용하여 1859년에 성토머스병원(St. Thomas Hospital)에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를 설립했다. 또 1869년에 나이팅게일은 영국 최초의 여자 의사인 블랙 웰(Elizabeth Blackwell, 1821~1910년)과 함께 여성의과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렇게 간호사로서 열심히 살았던 나이팅게일은 1910년 8월 13일, 잠자던 도중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죽자 의학계는 그녀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그녀의 생일인 5월 12일을 세계간호사의 날로 지정하게 되었다. 또 나이팅게일은 1975년부터 1994년까지 영국의 10파운드짜리 지폐 뒷면에 등장하기도 했다.

1910년, 국제적인 인도주의 구호단체를 설립한 공로로 여성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스위스의 앙리 뒤낭(Jean Henri Dunant, 1828~1910년)은 그런 나이팅게일의 헌신적인 희생정신을 기리며 “그녀가 일생을 통해 실천했던 영웅적이고 거룩한 헌신의 전통은 역사 속에 길이 보존될 것이다.”라고 격찬한 바 있다. 앙리 뒤낭이 설립했던 구호단체는 훗날 국제적십자 운동의 기틀이 되었다.

이런 나이팅게일의 일생이 말해주듯 세상은 그 사람의 말을 평가하지 않고 업적을 평가한다. 앙리 뒤낭도 그녀의 말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업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인류 역사를 보아도 말 못해 죽은 사람은 없어도 일 못해 죽은 사람은 많다. 그러므로 세상이 자신을 알아봐 주길 원한다면 말부터 하지 말고 일부터 하라. 말 재주를 부리지 말고 일 재주를 부려라. 반드시 세상이 그대를 알아보고 정중히 모실 것이다.

 

/임승환기자  press35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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