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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호기자] 우리가 잊어선 안 될 9.15일 인천상륙작전국방력 강화 더 단호함과 순국선열들의 구국 충정 정신 계승해야
김재호 기자/YBC연합방송

[YBC연합방송=김재호 기자] 9월 15일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날이며 6.25 전황을 단숨에 뒤집어 놓은 날이다.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6.25 전쟁 발발 시 9월 15일 국제연합(UN) 군이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에 상륙하여 6.25 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군사 작전이다.

이 작전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서울은 사흘 만에 함락됐고, 그 이후 한 달 만에 낙동강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을 빼앗기게 되자 국제연합군과 우리 군은 남쪽으로 후퇴 낙동강 방어선인 마산·왜관·포항·영덕 구간의 240km 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1950년 6월 29일 오후 영등포역 근처 한강 변에서 전항을 살펴본 뒤 인천 상륙작전을 결심하고 북한군이 한반도 남쪽까지 진격한 상황을 고려해 적 주력 부대의 후방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서울과 가까운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개시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참모들과 상륙작전을 실제로 수행할 미 합동참모본부(합참)와 미 해군본부가 인천은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해 상륙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인천 월미도가 작전에 장애물이 된다는 이유로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미 극동군 해군사령관 Chales Turnet Joy 제독도 이런 지형적 특징 때문에 성공률은 1/5000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참모들은 대안으로 전라북도 군산이나 경기도 평택 포승만 앞바다로 장소 변경을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인천이 이렇게 상륙하기 힘든 점을 알고도 상륙지로 결정한 것은 우회기동을 통해 적 후방의 단절과 보급로 차단, 그리고 적을 포위해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이라는 조건을 만족할 만한 특별한 장소가 달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이와 같은 이유를 들어 합참과 해군본부를 설득해 결국 1950년 8월 28일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 계획을 승인받게 되었다.

그 후 이 작전의 성공하기 위해서 우선 중공군과 인민군을 교란 병력 분산과 보급로 차단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 이틀 전인 13일과 14일 양일에 걸쳐 남한 지역에는 삼척, 군산, 영덕. 북한 지역에는 함경남도 신포시 마량도 남포시 등 해안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실시와 함께 경북 영덕 장사리 해안에 학도병으로 구성된 772명이 문산호를 타고 상륙하여 국도 7호선을 봉쇄하고 조선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일종의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

이어 9월 15일 00시 05분에 유진 클라크 미 해군 대위와 KLO 부대, 그리고 한국육군 및 해군 장교들로 구성된 연합작전 팀이 팔미도 등대를 점령하고 등대를 수리해 불을 켜서 상륙부대들의 주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이날 05시 00분에는 미 해군이 월미도에 상륙 준비 사격 실시와 함께 05시 45분에 미 제15 항모부대의 F4U 콜세어 10대가 출격 해안가 각 지역을 폭격했다.

그리고 14시 30분에는 블루 비치에는 루이스 풀러 대령이 지휘하는 미 해병대 제1연대와 한국군 해병 제1연대와 육군 제1연대가 인천항과 인천 남동부 상륙에 성공한 후 김포 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했다.

그 이후 9월 19일 미 해병 1사단을 주축으로 한 상륙부대는 인천 수복에 성공하자마자 바로 역할을 분담 미 해병대 1사단 5연대는 경인가도의 북쪽, 1연대는 남쪽을 통해 서울로 진격 마침내 9월 28일 북한군에게 함락당한 지 3개월 만에 서울을 되찾았다.

무엇보다도 인천상륙작전에 이은 서울 수도탈환의 성공은 심리적으로 국군 및 유엔군의 사기를 크게 제고시키고 북한군의 사기를 결정적으로 떨어뜨리게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북진을 통해 평양과 원산을 점령 후 압록강까지 진격했지만 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함으로서 통일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이룰 수가 없었다

또 불행하게도 6·25전쟁은 3년 1개월 지속하는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인명피해는 450만 명에 달했다.

그 가운데 남한의 경우 민간인 100만 명을 포한 약 200만명이며, 공산 진영의 경우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 직전 실시된 미군의 폭격에서 월미도 주민과 신원미산의 무고한 민간인 100여 명의 희생이 있었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 7748명, 미군이 3만 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북한군 정확한 전사자는 아직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인천상륙상전 성공과 6.25전쟁 전황을 단숨에 뒤집어 놓을 수가 있었던 것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정확한 상황판단과 전략 전술, 그리고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점 때문에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20세기 '칸나에 전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더 넓은 번영을 위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날을 올바르게 기억하고 이를 교훈 삼아 우리 모두를 위한 최강의 국방력 강화에 대한 더 단호함은 물론 우리 모두가 순국선열들의 구국 충정 정신을 계승해 나갔으면 한다.

/김재호기자  kh73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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